“그건 폭풍이 아니었소. 정령의 짓이었어요.”
어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저께 밤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부는 집채만큼 커다랗고 바람처럼 빠른 무언가가 어선을 침몰시켰다고 이야기했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쉔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이 들은 정보들을 종합해 보았다.
“사고 현장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어부는 쉔을 해안가로 데리고 나갔다. 그곳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익사한 선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쉔은 난파선의 잔해 옆에 꿇어앉아서 부서진 목재들을 살펴보았다. 나무 표면에 칼로 깊이 베어낸 것처럼 생긴 틈이 여럿 나 있었다. 강력한 발톱으로 할퀸 자국 같았다.
“전부 몇 명이 당했습니까?”
“나 빼고 전부... 여섯 명이라오.”
이 정령은 강한 것 같았다. 쉔은 배의 잔해를 둘러보면서 다른 단서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선체에서 쪼개져 나온 널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끄트머리에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아주 가느다란 털 여러 가닥이 뭉쳐 있는 게 보였다. 여느 사람이라면 못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설령 보았더라도, 그렇게 가늘고 섬세한 터럭들이 배 한 척을 박살낸 괴물의 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하지만 쉔은 이런 털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손을 가져다 대자 그 은빛 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걸 본 순간 쉔은 어부의 이야기에 과장이 섞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었다.
“악마로군요. 어르신이 탔던 배가 놈의 영역으로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쉔의 말에 어부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만물에는 온갖 종류의 정령들이 어우러져 있고, 영계와 물리계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아이오니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곳에서는 영적 차원과 물리적 차원이 서로 맞붙은 채 공존한다. 그릇 안에 든 물과 기름처럼.
황혼의 눈인 쉔은 두 세계 사이를 굽어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일을 했다. 인간들에게 쉔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유령처럼 보일 것이다. 반면 정령들에게는 쉔이 자기네 영토에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될,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쉔은 해안에 끌어올려진 시신들을 훑어보았다. 그 중 한 남자는 너무 처참하게 당해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도 쉽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해가 지기 전까지 제가 그 괴물을 잡겠습니다.”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쉔이 돌아보니, 이 지역 사원에서 보낸 사제가 도착해 있었다. 그 옆에서 견습 사제들이 신비로운 성물과 기름 등을 제단에 차리고 있었다. 이곳의 영적인 혼란을 잠재우는 정화 의식을 거행하려는 것이다. 사제가 쉔의 가치를 평가하는 듯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사님의 협력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사제의 질문에 쉔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균형은 회복될 것입니다.”
쉔은 사제를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은빛 털이 떨어진 흔적을 좇아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사망한 선원들을 생각하고, 그 악마에게 얼마만큼의 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지를 헤아려야 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하셨던 말씀이 귓전을 맴돌았다.
‘모든 것을 고려하여 균형점을 찾아내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황혼의 눈은 세상에 작동하는 모든 힘의 자장에서 정확히 중심 지점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중립’에 설 수 있다.
균형점을 찾아낸 뒤에는, 균형을 실제로 실현하는 과정이 잇따른다. 그 과정 역시 쉬운 것은 아니었다. 쉔이 등에 매고 다니는 검 두 자루는 그 일에 필요한 도구였다. 한 자루는 아이오니아의 강철 군도로, 일격에 사람을 벨 수 있는 명검이었다. 다른 한 자루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보인데, 순수한 비전 에너지가 깃들어 있었다. 쉔은 오랜 세월 그 검으로 악마, 유령, 망령, 정령 들을 숱하게 상대했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또 하나의 악마를 처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쉔은 어느 후미진 물가에 이르렀다. 호수처럼 작고 호젓한 그 만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었고, 얕은 물에서 모래톱이 솟아올라 있었다. 바로 그 위에 그 악마가 있었다. 고운 은빛 털이 저녁 햇살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녀석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이 더욱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 괴물은 희생자들의 정수를 빨아먹고 한껏 배가 부른 채 잠들어 있었다.
쉔은 수풀 사이로 살금살금 움직여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거대한 흉곽이 들숨과 날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쉔은 괴물에게서 몇 발짝 거리에 멈춰선 채 기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웬 날카로운 비명이 솟아오르다 뚝 멎는 것이었다. 귀에 익은 소리였다. 쉔은 손을 멈추고 그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즉시 똑같은 비명이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또 다시, 또 다시... 급기야 수많은 비명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와 섬뜩한 합창처럼 울려 퍼졌다. 이건 정령들이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이 분명했다.
쉔은 재빨리 악마를 돌아보았다. 놈은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쉔은 손에 든 기의 검을 내려다보고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침착하게 궁리했다. 그리고 두 손을 합장하고 기를 집중시켰다. 순식간에 그는 휘몰아치는 에너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고, 모래톱 위에 잠든 악마만이 홀로 그곳에 남았다.
쉔이 난파 사고 현장에 돌아와보니 온 사방에 시커멓고 걸쭉한 액체가 튀어 있었다. 액체가 지글지글 끓으며 증발하는 냄새와, 정령들을 휩쓸었던 공포의 악취가 공기 중에 진동했다. 쉔은 모래밭 위에서 사라져가는 검은색 물웅덩이의 수를 헤아렸다. 그것들은 각각 정령이 죽어 남긴 흔적이었다.
그런데 사제가 견습 사제들을 대동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쉔의 계산은 중단되었다. 견습 사제들 중 한 명은 아마실과 은실로 만들어진 노끈을 잡고 있었는데, 그 끈의 맨 끝에 작은 정령 하나가 묶여 있었다. 보잘것없는 요괴 한 마리였다. 녀석은 목줄이 답답한 듯 버둥거리면서도, 자기 형제들이 학살당한 광경 앞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이 녀석을 처치해 주시겠습니까?”
사제가 쉔에게 물었다. 저녁 식탁에서 수프 한 그릇을 권하듯 태평스러운 태도로.
쉔은 끈적끈적한 물웅덩이들을 둘러보았다. 이계의 강력한 존재들이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이곳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을. 그는 사제와 그 옆에서 울부짖는 요괴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유감입니다, 사제님.”
쉔은 기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대신 강철 군도를 꺼내 들었다. 원래 오늘 쓰려고 했던 무기는 이쪽이 아니었다.